본문 바로가기

브랜딩

감히 누가 위안과 위로라는 말을 할 것인가?

반응형
 

지인으로 부터 추천 받고 계속 듣고 있는 노래.

이 노래에 꽂혀서 나름 비슷하게 꽂히는 노래를 찾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며, 기획중인 공간에 이런 노래를 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노래, 공간, 브랜드, 서비스, 제품 모든 곳에서 위로와 위안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방황하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동조해줄 것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오랜 친구들도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예전의 독한 모습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둥글둥글하게 깍여있다.

나만해도 그런데 당연한 수순이겠지..

지금 운영하는 공간도 ‘위안’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기획할때는 ‘위안’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때 나도 힘이 들었고 위안이 필요했으니 자연스럽게 내게 필요했던 위안의 요소가 그곳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기획하는 새로운 공간은 조금 더 위안이라는 메시지가 중요해진다.

그때보다 세상은 좋아졌지만 그만큼 힘든 곳이 되었기 때문에 위로와 위안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변했다기보다는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변한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위안’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고민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뭐라고 남에게 위로와 위안을 준단 말인가

위로와 위안을 드리고 싶다고 해서 위안이 되는 것일까?

우리의 참견인 것은 아닐까?

언젠가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서 도와주는 것은 참견이고 오지랖일 뿐이라고.

우리는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스럽다.

무지개처럼 찾아왔을 때에는 감싸안아 주며 친구와 함께 있을 때에는 모른척해주는 그런 공간이고 싶다.